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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미술감상
작성자 청원고 등록일 09.04.28 조회수 802
파르미지아노(르네상스 매너리즘)


남자의 초상, 1523


사울의 회심, 1552


사가랴와 성모자, 1530


성 제롬과 성모자, 1534-5


성 캐더린의 신비한 결혼, 1525-7


이집트 피난의 휴식, 1524


거울에 비친 자화상, 1523


큐피트의 화살, 1532


엘 그레코(르네상스 매너리즘) | 명화모음
2005.07.08


사도 베드로


사도 베드로, 1606


사도 베드로의 책형, 1600


베드로와 바울, 1592


사도 바울, 1606


사도 다대오(유다), 1606


사도 도마, 1606


사도 마태, 1606


사도 바돌로매, 1606


사도 빌립, 1606


사도 시몬, 1606


사도 안드레, 1606


사도 요한, 1606


사도 야고보(큰 야고보), 1606


사도 작은 야고보


세례요한, 1600


엘 그레코(르네상스 매너리즘) | 명화모음
2005.07.08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 1588


그리스도, 1590-95


그리스도, 1606


동정녀 마리아, 1594-1604


마리아의 승천


막달라 마리아, 1580-85


그리스도의 성전숙청, 1570


그리스도의 성전숙청, 1600


계시록의 5번째 봉인, 1608-14


성 제롬, 1610-14


수태고지, 1569-70


목자들의 경배, 1614


성모자, 1597-99


요셉과 어린예수, 1597-99


예수의 세례, 1608-14


예수의 옷을 빼앗음, 1577-79


십자가길에서 만난 마리아


베로니카의 수건, 1579


십자가를 지고가시는 예수, 1600-5


십자가의 예수와 마리아, 요한, 1588


십자가의 그리스도 경배, 1608


삼위일체, 1577


예수의 부활, 1596-10


성령강림, 1596-1600


성 요한과 성 프란체스코


성가정, 1592


성가정, 1595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지옥, 1610-4


소경을 치료함, 1577-78


브론치노(르네상스 매너리즘) | 명화모음
2005.07.08


그리스도의 내려짐


기도의 책을 가진 소녀


나를 유혹하지 말라


비너스와 큐피트의 우화, 1545


성가족, 1527-8


성가족, 1540


젊은여인과 아들, 1540


톨레로와 아들, 1550


팔미온과 갈라테이아


행복의 우화


귀도바르도의 초상


바사노(르네상스 매너리즘) | 명화모음
2005.07.08


갈보리의 고난, 1540


가나안을 위한 아브라함의 현현


목자들의 경배


성전숙청


여름


가을, 1577


목자들에게 예수 탄생을 알려줌, 1533


성모자와 세례요한, 1570


성찬대, 1545-50


베로네제(르네상스 매너리즘) | 명화모음
2005.07.08


가나의 결혼식, 1563


가나의 결혼식(부분), 예수와 제자들, 1563


레비가의 향연, 1573


혈루증 여인을 고치심, 1565-70


수태고지, 1580


광야의 성 제롬, 1580


마르스와 비너스, 1570


모세의 발견, 1570-5


사랑의 비유, 1570


성 캐더린의 결혼식, 1575


세례요한의 설교, 1562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 1580


지혜와 힘의 우화


피에타, 1576-82


틴토레토(르네상스) | 명화모음
2005.06.29


자화상


가인과 아벨, 1550-53


갈릴리바다의 그리스도, 1560


금송아지 숭배, 1560


동물의 창조, 1550


모세의 발견


사울의 회심, 1544


성 마르코의 기적


요셉과 보디발의 처


발을 씻기시는 예수


천국, 1578-79


최후의 만찬, 1592-94


은하수의 기원


레다와 백조


목욕하는 수산나, 1560


비너스, 1550


수태고지


성모와 아기


그리스도의 세례, 1440


그리스도의 탄생, 1576-81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 1570-75


솔로몬의 재판


세례요한의 출생, 1550

틴토레토 <Tintoretto >(1518~1594.5.31)


이탈리아의 화가. 베네치아 출생. 본명은 Jacopo Robusti. 아버지가 염색장인(tintore)이므로 Tintoretto(작은 염색장인)라는 이름이 붙었다. P.베로네세와 함께 난숙기 베네치아파의 대표자이다. 처음에는 V.티치아노의 제자였으나, 1545∼46년 로마를 여행하며 미켈란젤로 및 마니에리스트들의 감화를 받았다. 48년의 《사라센인의 해난구조》(베네치아아카데미아 소장)는 베네치아의 전통적인 화려한 색채와 마니에리스모의 형식·구도를 융합한 화풍이 이미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 64∼87년 스쿠오라 디 산 로코의 벽화·천장화로써 신약성서와 성 로코의 생애를 묘사하였고, 또 파라초 두칼레의 재흥에 따라 《천국》(1588∼90)을 포함한 방대한 그림을 다수 제작하였다. 만년에는 《최후의 만찬》(베네치아 산조르조 마조레 소장)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목욕하는 수산나》 《베데스다 연못》 《이집트의 성모 마리아》 등을 그렸다. 빛과 색채의 극적인 효과, 왜곡된 공간표현 등의 기법은 16세기 후반의 마니에리스모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티치아노(르네상스) | 명화모음
2005.06.29


자화상


가시면류관, 1570


가인과 아벨


기도하는 성 캐더린, 1567-68


참회하는 막달라, 1533


세례요한, 1540


수태고지


아담과 이브


유혹하지말라, 1511-12


마리아와 예수, 1530


예수의 매장, 1525


밧모섬의 요한, 1547


피에타, 1576


성모자와 주교, 1513-14


십자가앞에서 무릎꿇는 안토니오, 1575-76


신들의 식사, 1514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다이아나, 1553-54


바커스와 아리안느, 1523-24


비너스의 경배, 1516-18


비너스와 큐피드, 1548


플로라, 1515

티치아노 (Tiziano Vecellio, 1488? ∼ 1576.8.27)


이탈리아의 화가. 북이탈리아의 피에베 디 카도레 출생. 베네치아에 전해진 플랑드르의 유채화법을 계승 하여 피렌체파의 조각적인 형태주의에 대해 베네치아파의 회화적인 색채주의를 확립하고, 생애의 마지 막까지 왕성한 제작활동을 하였다. 9세 때 베네치아로 나와 모자이크장인(匠人) 주카토의 문하에 들어갔 다가 얼마 후 젠틸레 벨리니에게 사사하고, 다시 그 동생인 조반니 벨리니의 문인이 되었으며, 동문인 조르조네에게도 배웠다. 기록에 남은 최초의 제작은 1508년 조르조네의 조수로서 독일인의 상관(商館) 폰다코 디테데스키에 그린 벽화이다. 그 이전의 ‘알려져 있지 않은 티치아노’의 기간이 너무 오래되 어, 최근에는 그의 생년을 1488~90년으로 추정하는 설이 유력하다. 초기 작풍은 조반니 벨리니와 조르조 네의 기법을 따랐으며, 피티화랑의 《합주(合奏)》 등은 조르조네의 작품인지 티치아노의 작품인지 판단 하기 어려울 정도지만, 유명한 《성애(聖愛)와 속애(俗愛)》(로마 보르게미술관 소장)에서는 이미 그 특 유의 사실적인 묘사의 견실함과 명쾌한 색채를 보여주었으며, 1518년 완성된 베네치아 프라리성당의 제 단화 《성모승천》에서는 선배들의 영향을 벗어나 자유로운 동적 표현으로의 진로를 보였다. 또 마드리 드의 프라도미술관에 있는 《비너스의 예찬》 《주신(酒神) 축제》를 비롯하여, 23년의 《바커스와 아리 아드네》(런던 내셔널갤러리) 등 일련의 고전신화 그림, 드레스덴회화관의 《공전(貢錢)》, 루브르미술관 의 《장갑을 쥔 사나이》 등은 구도의 동적 리듬에 한층 진보가 보이며, 색채도 명도(明度)를 더해서 원 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이렇게 확고한 기반을 닦은 그는 국내외의 여러 왕후들로부터 위촉받아 더욱 명 성을 떨쳤으며, 그 중에서도 독일황제 카를 5세를 위해 그린 33년의 《개를 데리고 있는 입상》(마드리 드 프라도미술관)은 그의 초상화 중의 걸작이다. 당시의 《마리아의 참배》(베네치아 아카데미아미술관) 《파르도의 비너스》(루브르미술관) 《우르비노의 비너스》(우피치미술관) 등은 풍속화적 ·풍경화적인 요소가 두드러지며, 인간성에 중점을 둔 독특한 작풍을 보여준다. 또한 풍만한 나부(裸婦)의 표현도 주 요한 모티프를 이루며, 40년대에는 《큐피드와 비너스》(우피치미술관) 《음악가와 비너스》(프라도미술 관) 《다나에》(나폴리국립미술관) 《거울을 보는 비너스》(워싱턴국립미술관) 《유로파의 겁탈》 등 독 자적 관능성을 발휘하였다. 45년에는 로마 교황 바오로 3세의 초빙으로 《교황 바오로 3세와 측근자》 (나폴리국립미술관)를, 48년에는 카를 5세의 초빙으로 《카를 5세의 기마상》(프라도미술관)을 그려, 원 숙한 기법을 보여주었다. 또한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의 많은 초상과, 《프랑수아 1세의 초상》(루 브르미술관) 《리미날디의 초상》(피티미술관), 그 밖의 몇 점의 자화상 등, 그 성격묘사의 예리함은 그 의 투철한 사실성의 깊이를 말해준다. 만년에도 왕성한 제작욕을 보여 《형관(刑冠)》(뮌헨미술관)과 같 이 격정적인 장면을 즐겨 그렸으며, 필치는 더욱 강해져서 마침내 그의 예술은 단려한 고전적 양식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격정적인 바로크 양식의 선구로서 17세기의 P.루벤스, H.렘브란트로 이어지는 길을 개 척하였다.


보디첼리(르네상스) | 명화모음
2005.06.28


비너스의 탄생, 1487


자화상, 1470


그리스도 애도


동방박사의 경배, 1482


비너스와 마르스, 1485


성 어거스틴


수태고지, 1490


탄생, 1500


아테나와 켄타우로스, 1480


유디트의 귀환, 1472


피에타


마니피캇의 성모자, 1484

보디첼리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의 화가. 본명 Alessandro di Mariano Filipepi. 피렌체 출생. 처음에는 필리포 리피에게 그림을 배운 듯하며, 이어 베로키오와 폴라이월로로부터 사실주의를 배웠다. 초기에는 《포르테차》 《유딧과 홀로페르네스》(1470, 우피치미술관 소장)와 《성(聖)세바스찬》(74, 베를린국립미술관 소장) 등에서 자연연구에 대한 소박한 정열을 보이는데, 그 미묘한 곡선과 감상적인 시정(詩情)에 일찍부터 독자적인 성격이 나타나 있다. 그 후 메디치가(家)를 중심으로 한 인문주의 학자· 시인들의 고전(古典) 부흥의 분위기와 신(新)플라톤주의의 정신에 접하고, 특히 안젤로 폴리치아노의 시에 고취되어 그린 《프리마베라(봄)》(77∼78, 우피치미술관 소장)는 시적(詩的) 정신과 자연연구의 아름다운 결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1478년 메디치가에 대한 파치 음모사건의 범죄자가 처형되는 벽화제작을 위촉받아 그린 것은 카스타뇨의 알비치 음모자 처형도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하나, 그 때의 벽화는 훼손되어 그 진부는 알 수 없다. 80년 온니산티성당에 그린 《성(聖)아우구스티누스》의 벽화를 보면, 카스타뇨의 엄격한 리얼리즘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카스타뇨의 영향도 일시적인 것으로 81년에는 산마르티노성당에 감미로운 《수태고지(受胎告知)》를 그리고, 감상적인 《마니피카토의 성모》(우피치미술관 소장)와 《책의 성모》(밀라노의 포르디 페초리미술관 소장)도 이 무렵의 작품이다. 또 81년부터 82년까지는 기를란다요, 페르지노 등과 함께 교황 시크스투스 4세의 부름으로, 보티첼리가 총감독이 되어 바티칸궁전 시스티나예배당의 측벽(側壁) 장식을 맡았다. 82년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로마에서의 일로 자신을 얻어, 그 후 약 10년 동안은 점차 사실(寫實)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화경(畵境)을 열었으며, 가장 충실한 원숙기를 전개하였다. 이 무렵의 작품으로는 《성모자(聖母子)와 두 성(聖)요한》(85, 베를린 국립미술관 소장) 《마르스와 비너스》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토르나브오니 렌미가(家)의 별장에서 나온 벽화》(루브르미술관 소장)를 비롯하여 《비너스의 탄생》 《메라그라나의 성모》(87) 《산바르나바의 성모》(우피치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비너스의 탄생》은 사실주의를 무시하고 양식화된 표현과 곡선의 묘미를 구사하여, 장식적 구도 속에 시적 세계를 표현한 걸작이다. 그러나 그 후의 대표적인 작품을 보면, 《수태고지》(89) 《성모대관(聖母戴冠)》(90, 우피치미술관 소장)처럼 차차 신비적인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91년에 도미니크회의 영걸(英傑)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성마르코수도원 원장으로 부임하여, 메디치가의 이교주의적 정책과 피렌체의 퇴폐적 세태를 격렬한 예언자적 설교로 공격하기 시작하자, 보티첼리는 그 설교에 매혹되어 신비적인 경향을 더욱 강화시켰으며, 단테의 《신곡(神曲)》의 삽화에 열중하여, 조형(造形)예술가로서는 자멸의 길을 밟았다. 《카룬니아(비방)》(우피치미술관 소장) 《피에타》(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소장) 《게세마네 언덕의 기도》 (그라나다 카필랴레알 소장) 《성(聖)히에로니무스의 최후의 만찬》(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등이 그런 경향을 보인다. 그러다가 98년 사보나롤라가 순교하자 보티첼리는 그의 슬픈 추종자로서 예언자적 신비주의로 변모하였으며, 1501년 제작한 《신비의 강탄(降誕)》(런던 내셔널갤러러 소장)이나 《신비의 십자가》(미국 케임브리지 포그미술관 소장)와 같은 신비적 환상으로 가득 찬 작품을 그렸다. 1504년 미켈란젤로의 다윗상의 설치장소를 심의하는 위원회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과 함께 출석하였으나, 그 후 그는 제작활동을 거의 중단하고 소식마저 끊었다.


벨리니(르네상스) | 명화모음
2005.06.28


그리스도의 변모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의 세례


두 천사의 시중을 받는 그리스도의 죽음


붉은 옷을 입은 천사의 마돈나


아기를 축복하는 성모, 1475


요한, 마리아와 그리스도


성 프란시스의 황홀경, 1480


술에 취한 노아


십자가의 고난


우르비노 교황의 초상


피에타


피에타


피에타


피에타


신의 축제, 1514


화장하는 숙녀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년경 베네치아-1516 베네치아)


이탈리아의 화가. 베네치아를 피렌체나 로마에 견줄 만한 르네상스 미술의 중심지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여겨지는 베네치아의 시의회당을 위한 그림들은 1577년 화재로 소실되었지 만, 많은 제단화(예를 들면, 베네치아의 산조반니 에파올로 교회의 제단화)와 그 밖의 현존하는 작품들을 통해서 볼 때 그는 순수하게 종교적인 이야기식 표현을 강조하던 경향에서 자연스러운 배경과 풍경을 강조하는 새로운 자연주의로 꾸준하면서도 대담하게 전개해 나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가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아버지 야코포는 15세기 고딕 부흥운동의 주요화가인 젠 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제자였으며, 그를 따라 피렌체로 갔던 것으로 여겨지며 두 아들에 앞서 베네치 아의 피렌체 르네상스의 원리를 소개했다.. 그는 젠틸레와 조반니라는 2명의 아들 외에 딸이 1명 이상 있었으며 그 가운데 니콜로사가 1453년 화가인 안드레아 만테냐와 혼인했다. 두 아들은 모두 아버지의 화실에서 그림을 처음 배웠으리라 짐작된다. 조반니 벨리니는 초기에 독자적으로 그린 그림들에서 야코포의 우아한 양식보다 파도바 유파, 특히 매 부인 만테냐의 수수한 양식의 영향을 더 강하게 보여주는데 1460년 만테냐가 만토바의 궁정으로 떠난 뒤에도 이러한 영향은 뚜렷이 보이고 있다. 이 시기보다 앞서 제작된 그의 초기 작품들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변모>, <천사들이 떠받치고 있는 죽은 그리스도>등이 있다. 이 시기와 이 전에 제작된 몇몇 작품들이 미국에 있으며 그 외의 것들은 베네치아의 코레르 시립미술관에 있다.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는 3폭 제단화 4점과 밀라노에 있는 2점의 <피에타>역시 초기작품들이다. 초기 작업의 특징은 현재 런던 국립미술관에 있는 <구세주의 피>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통>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초기 작품은 모두 템페라로 제작되었으며 그 자신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 적인 정서와 깊이 있는 종교적인 감성을, 파도바 유파의 장엄함, 엄격함과 잘 융합시켰다. 아버지의 화 풍을 이어받은, 초기의 성모를 주제로 한 그림들은 대부분 표현이 부드럽지만, 장식적인 화려함보다는 자연 관찰에서 끌어낸 감각적인 표현을 더 많이 사용했다. 이 그림들에서는 형태를 나타내기 위해 양감 에 의존하기보다는 오히려 피렌체 화파의 전통이나 특히 만테냐 양식처럼 선을 주로 사용하는 표현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조반니 벨리니의 작품에서는 선의 사용이 만테냐의 작품보다 자연스러우며 무엇보 다도 묘사된 대상의 표면이 극적으로 밝은 하늘을 배경으로 반짝이며 드러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르네 상스 회화의 창시작인 마사초와 당대에 가장 뛰어난 르네상스 회화를 보여주었던 피에르 델라 프란체스 카와 마찬가지로 조반니 벨리니도 처음부터 자연광을 그린 화가였다. 초기의 작품들 중에는 인물들이 서 있는 수직적인 단순한 풍경 뒤 하늘이 수평으로 물줄기처럼 드리워져 있는 작품이 많았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통>에서는 수평선이 위로 올라가 있으며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깊고 넓은 풍경이 이 장면의 극적 효과를 나타내는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그의 그림에서는 등장인물과 마찬가지로 풍 경의 정교한 선적 구조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무엇보다도 새벽빛을 받은 듯 그늘 속에서 반짝거리는 것이나 찬란하게 반사되는 면을 표현한 색채가 가장 주목할만하다. 이것을 그 뒤 1세기가 넘도록 끊임 없이 발전한 베네치아 풍경화의 첫 작품이다. 지금도 베네치아의 산조반니 에하올로 교회에 있는 성 빈 센트 페레르에 관한 구성이 뛰어난 제단화는 아마 10년 뒤인 1470년대 중반쯤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근본적인 구성의 원리와 화법은 변하지 않았으며 표현이 오히려 더 심화되었다. 벨리니가 완숙 기로 나아가는 과정에 가장 커다란 도움을 받았음이 틀림없는 피에로 델라프란체스카의 영향을 받은 시 기는 아마 그 뒤 오래지 않아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여행하는 동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페사로 에서 그린 뛰어난 그림인 <성모의 대관식>은 완전히 르네상스 양식에 따라 그린 최초의 베네치아 회화 로서, 보르고 산토폴크로의 산아고스티노 교회에 있는 여러 폭 그림의 가운데에 있다가 분실된 후 기록 에서 빠진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성모의 대관식>에 나타난 개념들을 구도에 깊이 반영하고 있다. 성령의 광채를 받으며 그리스도가 성모에게 대관식을 베푸는 장면은 봉헌의 엄숙한 행동이며, 옥좌 곁 에서 입회인으로 서 있는 4명의 성인들은 그들의 자애로움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신부의 특징, 옷의 질 감, 지니고 있는 물건들 등의 세부묘사가 잘 나타나 있다. 마사토와 피에로 델라 프란테스카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전경과 옥좌를 처리한 색감과 원근법은 마치 인물들이 실제 공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준 다.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은 그 뒤의 배경으로 확장되며 이 장면을 온통 감싸고 모든 형태들을 하 나로 묶어주는 하늘의 광휘에 의해 무한한 느낌을 주도록 처리되었다. 조화는 모든 예술의 목표이지만 조화의 중요성은 그 자체의 밀도뿐만 아니라 각 부분들이 수행하는 역할에도 달려 있다. 여기에서 벨리 니는 인간성이 깃든 자연의 웅장함을 보여주는데, 그 자연은 인간의 모든 종교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이루어진 통일성에는 그의 독특한 정서적 온기가 스며 있다. 이 시기에 조반니 벨리니는 기법면 에서 또다른 업적을 남겼다. 그가 이때 이미 유화를 주로 그렸다는 사실만으로는 그가 뛰어났다고 할 수 없다. 당시에는 피에르 델라 프란체스카를 비롯한 많은 이탈리아 화가들도 이미 유채를 사용하고 있 었다. 1475(또는 1476)년 베네치아에 있었던 안토넬로다 메시나의 소개로 유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템 페라를 그만두었다는 설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이 두 재료는 상당히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 기 때문이다. 차이를 가져오는 것은 재료의 사용방법이며, 그것은 화가의 의도와 시각에 달려 있다. 앞 으로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의 풍부하고 폭넓은 시각이었다. 유화는 좀더 투명하고 녹기 쉬운 특성이 있으므로 광택의 정도를 높여주고 반투명의 색면층을 걸쳐 칠함으로써 더욱 풍부한 색채와 색조 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전례없는 다양한 유화기법을 통해 그는 베네치아파의 풍부함을 자신의 완숙한 화법에 접목시킬 수 있었다. 형인 젠틸레 벨리니가 베네치아의 시의회당에 중요한 역사적 장면들을 그리는 일을 맡아 하던 중 1479 년 콘스탄티노플에 사절단으로 파견되자 조반니 켈리니가 그 일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1480년까 지 그는 6-7점의 새 작품을 그리는 일뿐만 아니라 시의회당의 그림들을 복원하는 일에 상당한 시간과 정력을 쏟았다. 이것들은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들이었지만 1577년 화재로 거대한 시의회당과 함께 잿 더미로 변해버렸다. 지금은 다만 그의 조수 중 1명이 완성해 서명한 작품으로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교 회에 있는 <성 마르코의 순교>에서 그 구도를 비슷하게나마 유추할 수 있을 뿐이며, 1507년 젠틸레 벨 리니가 베네치아에서 죽은 뒤 그가 대신 완성한 <알렉산드리아에서 설교하는 성 마르코>를 통해 그 제 작방식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대형 제단화와 그 외 비교적 운반이 쉬운 작품들은 매우 많이 남아 있으며, 꾸준하면서도 대담한 작업의 진전을 보여주고 있다. 페사로에 있는 제단화의 원리와 기법은 베 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소장된 산조베 예배당의 제단화인 커다란 성모화에서 굉장한 발전을 보이 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후방의 커다란 옥좌에 않아 있는 성모와 양옆의 성인들이 마치 금방이라도 반사 되는 빛에 녹아 들어갈 듯이 보인다. 이 그림은 연대가 밝혀진 그의 작품 중 가장 초기(1487)의 것으로 역시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는 <알베레티의 성모>보다 앞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그의 활동의 초기 20년 동안에는 성모와 피에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등으로 주제가 제한되어 있었 으나, 15세기말경에는 매우 풍부해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주제(여전히 주로 종교적이었음)를 더욱 폭 넓게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림의 실제 배경인 주위 환경이 새롭게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그 는 뛰어난 풍경화가로서의 외광의 효과를 충실히 나타냈기 때문에 그림에 나타난 풍경으로 계절뿐만 아 니라 하루중의 어느 시간이지도 알 수 있다. 벨리니는 또한 상상의 장면들, 즉 지금까지 그려왔던 것이 아닌, 처음으로 그리는 색다른 소재의 그림에도 뛰어났다. 베네치아에 있는 산타마리아데이미라콜리 교회의 중앙 제단을 위해 그린 <명상에 잠겨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와 프릭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는 <황 홀경에 빠져 있는 성 프란키스쿠스>에서는 대지의 구조를 신체의 구조에 못지 않게 상세히 연구하고 있는데 이러한 자연주의의 목적은 사실적인 세부묘사를 통해 이상주의를 표현하는 것이다. 현재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풍경화<신성한 알레고리>에서 그는 처음으로 환상적이고 신비한 그림을 그렸는데, 그의 제자인 조르조네는 그 뒤 이러한 성격의 그림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초상화에서도 이와 똑같은 이상주 의를 찾아볼 수 있다. 런던 국립박물관에 있는 <총독 레오나르도 로레단>에는 절대군주가 지니고 있는 현명하고 관대하면서도 확고한 태도가 잘 나타나 있으며, 영국 왕실이 소장하고 있는 <피에트로 벰보> 는 시인의 감수성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예술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그의 생애는 평온하고 순조로웠던 것 같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의 유 파는 권위와 찬사를 받았으며 많은 제자들이 그의 영향을 널리 퍼뜨렸다. 제자들 가운데 그보다 6년 일 찍 죽은 조르조네와 티치아노는 스승을 능가하는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그에 관한 개인적인 서술로 현 존하는 유일한 자료는 알브레히트 뒤러가 1506년 베네치아에서 독일의 인문주의자인 빌리발트 피르크하 이머에게 쓴 편지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이 내게 그가 매우 진실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진실로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이가 많은데도 여전히 가장 뛰어난 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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