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uses in Montmartre
....집들이 고독하면 사람보다 더 쓸쓸할 수 있다. 거리가 황폐하면 사람보다 더 무정해 질 수 있다. 풍경이 늙으면 사람보다 더 아득해 질 수 있다.
-햇살 속에 발가벗은 中에서 -
Snow in Montmartre
Church of Saint-Severin
The Seine (1905)
위트릴로와 모딜리아니의 몽마르트신화는 유명합니다. 위트릴로를 찿으려면 시궁창 도랑을 따라가다보면 어디엔가 처박혀 있을거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라니 어지간합니다. 또한, 동네사람들은 길에서 풍경을 그리고 있는 그의 이젤을 걷어차곤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방안에서 자신의 동네를 찍은 엽서를 보고 그리는 경우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프란시스 카르코가 지은 <위트릴로 평전>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 술집에 가면 틀림없이 위트릴로를 만날 수 있었다. 카운터 옆에 서 있거나 그렇잖으면 벌써 고주망태가 되어 문밖의 시궁창에 드러누워 가끔 "쌍"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 사람들은 매정하게도 그를 쫓아냈고 그는 쓰러져서 신음하며, 또 울었다.'
그는 자기그림 몇작품을 주어야만 술한병을 살 수 있었습니다.
Bistros in a Suburb (about 1910)
1908년경부터 백색시기가 시작되는데 이 시기의 작품은 석고와 집착제를 혼합하여 사용합니다. 1915년경까지 지속되는 이시기의 그림엔 엷은 때가 묻은 희끄무레한 벽, 어둠침침하고 인적이 없는 거리, 쇠살문이 닫혀 있는 호텔, 교회 등 그가 늘 헤매고 다니는 몽마르트의 구석구석이 등장합니다. 백색시기야말로 위트릴로의 창조력이 절정에 이른 시대로서 음주벽은 여전하였으나 걸작품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그려집니다. 또한, 엘리포르나 옥타브 미로와 같은 미술 평론가로부터 극찬을 받게 되는데, 후에 그는 당신이 파리를 떠난다면 기념으로무엇을 가자고 가고 싶은가? 라는 질문에 "건물의 회벽 한조각을 가지고 가겠다"고 답합니다.
생 피에르 공원에서 본 파리 풍경
코탱의 골목
'백색 시기'의 위트릴로 작품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는 그림입니다. 건물, 돌계단, 가느다란 좁은 길 등이 모두 직선으로 그려져 정연한 구도를 느끼게 하고, 인상적인 흰 벽면들이 통일되어 안정감을 부여합니다. 집집마다의 창엔 덧문이 닫혀지고 돌계단을 오르는 4, 5명의 인적, 그리고 그 상단에 보이는 푸른 나무와 노란 꽃. 견디기 어려운 위트릴로의 아픔이 이렇게 쓸쓸한 골목길의 정경을 그리게 한 영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깊고 외로운 시정이 물씬 풍기는 애수어린 작품입니다.
몽마르트르 풍경
이 그림 역시 백색 시기의 것이며, 몽마르트르의 풍경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에 속합니다. 몽마르트르 술집에서 그의 심장이 고동치고 몽마르트르 거리에는 그의 체취가 담겨져 있는 듯 합니다. 때에 찌든 벽, 직선으로 구축된 건물들이 그의 체취를 물씬하게 풍기는데 원경으로 이어지는 납색 하늘이 서정적입니다. 이 근처를 몽스니 거리라고 부르며, 위트릴로가 살았던 코르토가가 있습니다. 위트릴로의 풍경화 가운데서 아름다움의 정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불랑 망토 교회
위트릴로는 남작에 가깝도록 다작을 했습니다. 유화만도 3천 점을 헤아린다고 하는데요 이러한 다작 속에서 교회를 그린 그림은 비율로 따져서 높은 편이 못 됩니다. <불랑 망토 교회>와 <샤티용 쉬르 센 교회> 및 <도 이유 교회>, <노트르담>, <생 드니의 대성당>은 위트릴로란 이름과 함께 잊을 수 없는 교회의 작품입니다. 1938년 모친이 사망하자 그는 거의 광적인 신앙심으로 하루에도 여러 번씩 기도실에 들어가 눈물의 참회를 하는데 이는 젊었을 때의 방종에 대한 회의와 자책이며, 그의 본질을 나타낸 진실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두유 마을의 교회
짙은 납색 하늘 아래 우뚝 선 교회, 웅장하지는 않지만 중량감이 있고 어떠한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양괴감이 화면에 가득 차 있습니다. 깊은 흰색과 그 흰색 속에서 튀어나온 약간의 황색과 녹색이 미묘하게 융합되어 태산같이 과묵한 이미지를 낳습니다. 그는 교회를 그리는 자체를 신앙의 표백이나 기도의 연장으로 생각했습니다. 교회를 이렇게까지 깊숙하고 풍요하게, 침묵의 정취로써 포착한 작품이 여타한 화가의 그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라팽 아질
라팽 아질은'냄비에서 도망간 토끼'라는 뜻입니다. 사크레 쾨르의 뒤쪽이 되는 생 방상 거리의 한 모퉁이에 위치한 유명한 카페인데 풍경 화가인 앙드레 질이 그린 '토끼 간 판'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부서진 창 문, 깨어진 유리창, 얼룩진 벽 등이 위트릴로 특유의 체취를 풍겨 주고 아름다운 나무숲에 둘러싸인 건물만이 농회색 하늘 아래 화창한 여름철을 시사 해줍니다. 이 카페에는 피카소, 브라크, 그리스 등이 자주 얼굴을 나타내 한때는 인상파들의 카페 게르브와 대적인 존재였으나, 이 화면에서는 그러한 흥청거림은 거의 없고 조용한 시골집처럼 보입니다. 위트릴로란 이름과 몽마르트르를 사랑하는 노스탈지와 그밖에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작품입니다. 카페 게르부아가 몽마르트르 시대를 열었다면 몽마르트르 신화의 마지막을 장식한 카페는 단연 <라팽 아질>이었습니다.
미미 팽송의 집
몽스니 거리는 위트릴로의 생활과 예술의 고향이며, 미미 팽송은 바로 몽스니 거리에 있는 그의 단골집입니다. 이 화면에 나오는 거리와 건물과 굴뚝은 그가 술에 취했을 때 그의 대화상대였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위트릴로에게 이 거리를 그리도록 요구했고, 그때마다 순진한 그는 이러한 요청을 거절하지 못해 무수한 그림을 남작하기에 이릅니다.
파리의 골목
<코르테 거리>와 비슷한 이미지를 풍기는 그림인데 가로수가 보이지 않아 광물적인 경질의 이미지가 강조된 쓸쓸한 거리입니다. 이 그림에서 그가 흰색에 바친 애정과 정열이 얼마나 강렬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데, 평생을 몽마르트르에 바친 그의 정념은 바로 흰색에의 끝없는 사랑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위트릴로는 자기 팔레트의 백색 물감 속에 모래나 석회를 섞어 넣음으로써 그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본 돌벽이나 집들의 피사드의 질감에 접근하려고 했는데, 실제로 그의 작품을 대해 보면 그의 흰색은 비바람에 바래고 손때와 땀에 절은 '호흡하는 흰색'임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아스니에르 마을의 거리
위트릴로는 시슬리의 작품을 좋아했고 시슬리의 작풍을 본뜨려고 노력합니다. '나도 시슬리 처럼 그릴 수 있을까?'는 그가 24세 때 고백한 말인 데, 아스니에르 마을의 거리에서 시슬리의 정지된 상태에 가까운 조용하고 차분한 뉘앙스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직선에 의한 구성은 위트릴로의 '백색 시기'를 특징 지은 묘법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축축한 습기 머금은 하늘과 길, 일체의 소음이 사라진 한낮의 거리, 대낮의 시정이 그의 독특한 흰색에 의해 더욱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몽마르트르 생 피에르 교회
생 마그리트 교회가 '백의 시대' 때의 작품인데 비해 <생 피에르 교회>는 '다색 시대'의 작품입니다. 위트릴로는 이 그림 외에도 생 피에르 교회를 그린 <생 피에르 교회와 사크레쿠르>를 그렸는데 이 그림은 세밀한 필치에 산뜻하고 깨끗하며 평면적이긴 하지만 서민적인 정감이 부족한 게 흠입니다. 생 피에르 교회는 파리의 수많은 교회 중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교회이며 1938년에는 모친 발라동의 장례식이 거행된 곳이기도 합니다. 위트릴로가 이 그림을 제작할 때는 어느 정도 대중화되었고, 동시에 그의 생활에도 여유가 생겼으며, 반면에 알콜에 빠지는 등의 행동 거지를 감시 받기 시작했던 시기였습니다.
노트르담
위트릴로의 변화를 실감있게 관조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는 1913년의 개인전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소위 뜨게 됩니다. 그림 1점에 2프랑 하던 것이 수 백 프랑으로 오르고, 술집에서도 그를 천대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와 때를 같이하여 '백색 시기는 막을 내리고 '다색 시대'로 접어들면서 그의 화면에는 정신적인 긴장감이 완만 해져 갑니다. 부드럽고 선명하며 평면적이기는 하나 끊고 맺는 박진감이 사라져 갔던 것입니다. <노트르담>은 이와 같은 변화의 과정을 볼 수 있는 좋은 본보기 작품입니다. .
로뱅송의 선술집
위트릴로의 36세 때 작품인데 화면 전체가 밝고 아름다우며 특히 그의 그림에서 보기 힘든 선명한 녹색의 향연을 표출시킨 것이 이색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고요와 평정은 대상에 대한 그의 마음속의 대화라기보다 표피적인 관찰 즉 시각 체험에 의한 대상의 재현으로 보여지며 이러한 경향은 이 시기의 그의 예술에 이미 하나의 양식으로 굳혀져 갑니다.
프티 팔레
이 그림을 제작한 1922년에 그는 폴 기욤 화랑에 '백의 시대' 때 작품을 주축으로 35점을 전시했는데 깜짝 놀랄 정도의 호평을 받습니다. 명성도 높아지고 돈도 생기면서 그는 전처럼 술집에서 천대받지도 않습니다. 또한 술에 취해 거리에 곯아떨어지지도 않는 착한(?)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이 그림은 누군가의 주문에 의해 그림 엽서를 보고 제작한 것입니다.
몽마르트르 라셀가
엉덩이가 큰 육감적인 여인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습니다. 위트릴로의 이전 그림에서는 별로 볼 수 없었던 인물이 그의 그림에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그림에는 이상하게도 정면에서 묘사한 인물이 거의 없고 대개가 뒷모습입니다. 전해인 1921년 6월에 그는 어머니 발라동과 함께 웨일 화랑에서 2인전을 열어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는데 공교롭게도 엉덩이가 큰 여인들은 이 무렵부터 나타납니다.
눈 덮인 라팽 아질
농회색 하늘 아래 아름다운 수목에 싸인 여름철의 라팽 아질을 그린지 26년이 지난 후에 그린 눈에 덮인 라팽 아질의 모습입니다. 구도, 화면 구성, 건물의 주변, 점묘로 된 인물까지도 두 그림은 똑 같은데, 단 하나 다른 것은 계절입니다. 위트릴로는 이 그림을 제작하기 전해인 1935년에 루시와 결혼했고 런던에서 '백의 시대전'을 열어 호평을 받았으며 다음해, 즉 이 작품을 완성시킨 해에는 화상 페트리데스와 독점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여유 있는 시기였는데요. 26년 전의 라팽아질에서 그의 땀내와 술내와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면, 이 그림에서는 그의 아련한 추억만이 남아 있는 듯합니다.
포와시 거리
1942년 위트릴로 59세 때의 작품입니다. 다작, 남작, 똑같은 모티브의 반복, 똑같은 색채등등... 미술 평론가들은 그의 50대 이후의 작품을 무기력하고 혼이 빠진 그림이라고 혹평하며, 숫제 작품으로 취급하는 것조차 기피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선입견이 아니더라도 어딘지 맥이 빠진 듯합니다. 그리고 그리다 만 미완성의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은 생기나 활기가 전혀 없습니다.
Rue des Abbesses (ca. 1910)
그는 코르시카 여행 후 점차 색채가 선명해졌으며 예전의 서정성이 희박해지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성공과 동시에 쇠퇴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죠. 말년의 25년 동안 건강이 회복되고 명예를 얻고 돈많은 미망인과 결혼하여 생활도 안정되었으나 작품에서 이전에 보여주던 긴장도는 사라집니다. 만년에 그는 신앙심 두터운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었으며, 프랑스 남서부의 다크스에서 폐충혈(肺充血)로 생애를 마칩니다
Rue de la Jonquiere (about 1909)
나는 나의 작품에서 시든 꽃내음이 풍겼으면 좋겠다. 또 황폐한 사원의 꺼져버린 초의 냄새가 풍겼으면 좋겠다. 비록 내가 그린 가난한 집이 현실에서는 허물어져 버린다해도...... ...Utri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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